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일본 시코쿠 오헨로 순례길, 길의 구조와 여정, 자기 성찰의 걸음

by 잘난소 2025. 7. 21.

일본 시코쿠 지방의 오헨로 순례길은 단순한 하이킹 코스를 넘어서,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정신적 여정입니다. 총 88개의 사찰을 잇는 이 길은 불교의 깊은 철학과 자연의 아름다움, 그리고 인간 본연의 내면을 마주하게 합니다. 이 글에서는 오헨로의 기원과 의미, 순례길의 구조와 여정의 특징, 그리고 자기 성찰의 걸음이었던 이 길에서 체험자들이 느낀 삶의 변화까지 구체적으로 소개합니다.

산길 걷는 사람의 신발

일본 시코쿠 오헨로 순례길

일본 시코쿠 지방에는 전 세계에서도 드물게 유구한 종교적 의미를 간직한 순례길이 있습니다. 바로 오헨로라고 불리는 순례 여정으로, 총 88개의 사찰을 순례하며 걷는 이 길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바꾸는 체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코쿠는 일본 4대 섬 중 하나로, 비교적 외부 문명에 덜 노출된 자연환경과 전통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오헨로 순례는 천년의 역사를 이어오며, 현대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오헨로는 고보 다이시라는 승려가 창시한 신공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일본 불교의 실질적인 기초를 세운 인물로 평가받으며, 시코쿠 전역을 돌며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한 인물입니다. 이 순례길은 바로 그가 걸었던 길을 따르며 88개의 정식 사찰을 돌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순례자들은 고보 다이시와 함께 걷는다는 의미로 동행 이치미라 새긴 흰 옷을 입고, 지팡이를 짚고 길을 나섭니다. 오헨로는 반드시 도보로만 완주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순례자들이 일부 또는 전체 구간을 직접 걸으며 체험하고자 합니다. 도보 순례는 약 1,200km에 달하며, 전 구간을 완주할 경우 최소 40일 이상이 소요됩니다. 그러나 이 길을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거리를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향해 걷는 과정이라는 의미가 더 큽니다. 따라서 일부 순례자들은 특정 사찰만 골라 짧게 체험하기도 하며, 어떤 이들은 매년 한두 구간씩 걸으며 수년에 걸쳐 완주를 시도하기도 합니다. 이 여정은 특정 종교를 믿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힐링과 자기 성찰의 도구가 됩니다. 일본 내에서도 은퇴 후의 삶을 계획하며 순례길에 나서는 이들이 많고, 외국인 여행자들 중에도 자연 속에서 명상과 평화를 찾고자 하는 이들의 비중이 늘고 있습니다. 시코쿠는 비교적 소박하고 조용한 지방이기 때문에, 관광지의 소란함과는 전혀 다른 감각의 여행을 제공합니다. 사찰마다 풍경은 물론, 구조, 이야기, 사람들 모두 다릅니다. 종교 시설이면서도 지역 주민들과의 소통, 시골 풍경과의 만남,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살아 있는 공간입니다. 이처럼 오헨로 순례길은 일본 고유의 정신과 철학, 자연, 그리고 인간다움이 결합된 복합적인 여정입니다.

길의 구조와 여정

오헨로 순례길의 구조는 시계방향으로 도쿠시마에서 고치, 에히메, 가가와까지 시코쿠 4현을  잇습니다. 각 사찰은 번호가 붙어 있으며, 1번부터 88번까지의 흐름은 영적 성장의 순서를 상징합니다. 도쿠시마 지역에서는 깨달음의 길, 고치에서는 수행의 길, 에히메에서는 깨달음의 실천, 그리고 마지막 가가와에서는 열반의 경지를 상징합니다. 이런 구성은 단순히 시코쿠 4현을 일주하는 것이 아닌, 정신적인 여정을 함께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순례자들은 전통적인 순례 복장을 갖추고 다니기도 하는데, 이는 신성한 의식으로서의 여정을 강조합니다. 흰 옷은 순수함과 죽음을 상징하며, 이는 곧 자신이 한 번 죽고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스태프라 불리는 곤조에는 고보 다이시의 분신으로 간주되어, 바닥에 내려놓을 때조차 정중한 예를 표하며 다루어집니다. 또한 각 사찰마다 도장을 받는 노키초라는 순례 수첩은 여정의 기록이자 정신적 유산으로 남습니다. 사찰의 분위기는 제각각입니다. 깊은 산속에 위치해 하이킹에 가까운 곳도 있으며, 마을 한가운데 소박하게 자리 잡은 사찰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찰은 입장료 없이 개방되어 있으며, 순례자들에게 따뜻한 인사를 건네는 주민들도 많습니다. 이들이 제공하는 오세타이는 순례자에게 음료나 간식, 때로는 숙소까지 무상으로 제공하는 전통적 환대 문화로, 오헨로 길의 가장 인상적인 특징 중 하나입니다. 도보 순례를 선택할 경우, 하루 20~30km 이상을 걷는 일정이 일반적입니다. 이는 체력적인 부담도 크지만, 걸으면서 자연스럽게 명상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길 위에서 마주치는 벚꽃이 흐드러지는 들판이나 물안개 피어오르는 계곡, 혹은 작은 산골 마을의 풍경들은 TV나 잡지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현실감과 정서적 울림을 제공합니다. 또한 순례는 철저히 개인의 속도에 맞춰 진행될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돌아보며 하루하루를 기록하는 일은 일상에서는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일이며, 이 과정을 통해 많은 이들이 삶의 본질에 대한 자각을 경험합니다. 오헨로를 다녀온 이들 중 많은 수는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또는 치유를 위한 시간으로 이 길을 선택한다고 말합니다. 현대 일본 사회에서도 이 오헨로 순례는 여전히 존중받는 문화로 남아 있습니다. 정부 차원에서 길을 정비하고 안내 표지판을 설치하는 등 관광적 요소를 강화하고 있지만, 그 본질은 여전히 정신적 여정이라는 점에서 변하지 않습니다. 일부 구간은 자전거로도 이동이 가능하며, 투숙할 수 있는 민박과 절 숙소인 슈쿠보도 점점 다양해지고 있어 외국인 여행자들도 큰 불편 없이 체험이 가능합니다.

자기 성찰의 걸음

디지털 시대, 고속 사회 속에서 우리는 점점 걷는 행위의 의미를 잊고 살아갑니다. 빠르게, 효율적으로, 목적만을 향해 달려가는 삶 속에서 오헨로 순례길은 정반대의 가치를 제시합니다. 빠름보다 느림을, 소음보다 침묵을, 외면보다 내면을 중시하는 이 여정은 지금 이 시대에 더욱 필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실제로 오헨로 순례를 완주한 이들은 이 여정이 단지 종교적 체험이 아니라, 자신과의 화해, 자연과의 조우, 사람과의 진정한 만남이었다고 말합니다. 일부는 우울증이나 심리적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로 이 길을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긍정적인 변화를 체험했다고 전합니다. 또 어떤 이는 직장을 그만두고 인생의 방향을 재정립하는 과정으로 순례를 택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오헨로는 개인마다 다르게 다가오지만, 그 핵심에는 자기 성찰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여정의 끝에서 돌아본 길은, 단지 땅 위를 걷던 길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의 무게를 내려놓고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운 치유의 길이자, 삶을 다시 정의할 수 있는 가능성의 통로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여행을 단순한 소비가 아닌 인생의 한 장면으로 만들어 줍니다. 만약 삶의 어느 시점에서 방향을 잃었다면, 혹은 그저 자신만의 시간을 찾고 싶다면, 시코쿠의 오헨로 순례길을 걸어보길 권합니다. 목적지가 아닌 과정에 의미를 두는 이 길은, 언젠가 우리 모두가 한 번쯤 걸어야 할 인생의 여정일지도 모릅니다.